지하철 3호선 현대건설역. 서울교통공사가 진행한 '지하철 역명 유상병기 사업자 공모'로 인해 지난 9월부터 안국역에 붙여진 새로운 부역명입니다. 현대건설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일상공간인 안국역. 이곳의 숨은 이야기와 매력을 전문가의 시각으로 만나봅니다.
왕이 보았던 겨울의 첫 풍경
[ 흰 눈과 까만 처마의 조화가 아름다운 은빛세계를 선사하는 창덕궁의 겨울 풍경 ]
지금 창밖을 바라보세요. 여러분의 자리에서는 어떤 풍경이 보이시나요? 지난해 봄 현대건설 뉴스룸에 올라온 ‘현대건설의 스마트오피스 실험’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창덕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맛집 휴게 공간’이라는 설명의 사진이 유독 눈길을 끌었어요. 감회가 새로웠죠. 저는 첫 직장 생활을 현대건설 사옥 맞은편인 가든타워 10층에서 시작했습니다. 가끔씩 건물 비상계단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지요. 매번 창덕궁을 내려다보며 ‘내일은 땡땡이를 치고서라도’하고 산책을 다짐했습니다. 결국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요. 손에 닿을 수 있는 행운이어서 소홀히 했나봅니다. 회사가 이사하는 날, 창덕궁을 보며 왠지 그런 실수를 자꾸 반복하며 사는 것 같아 아쉬웠던 기억이 나네요.
[ 눈 내린 창덕궁 인정전의 풍경. 왕이 걸었던 중앙의 길이 비질이 되어 있습니다 ]
이번 북촌기행은 창덕궁입니다. 그날의 실수를 만회하려 이후로는 참 많이 다녀왔습니다. 사계절을 고루 느껴 보았고요. 혹시 눈이 내린 다음 날 창덕궁에 다녀오신 적이 있으신가요? 첫 개장 시간에 맞춰서요. 새하얀 눈으로 덮인 궁궐에 첫 걸음을 떼는 거죠. 물론 창덕궁에 들어서는 순간 그건 나만의 상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에는 비가 지난 자리부터 선명하게 드러나거든요. 그런데 왠지 그 풍경이 또 감동적입니다. 누군가는 우리를 맞이하려 창덕궁을 구석구석 쓸고 닦고 있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막 개장한 창덕궁을 걸을 때는 왕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간밤에 눈이 왔고 대조전에서 잠을 깬 왕과 왕비가 문을 열고 바깥으로 걸음을 뗐을 때, 세상은 온통 하얗게 뒤덮여 있지만 왕이 지나가게 될 길들만은 분명 비질이 되어 있었을 테니까요.
[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돈화문의 전경. 회화나무 가지마다 눈이 쌓여 운치를 더합니다 ]
그 영화(榮華)를 떠올리며 왕이 된 듯 돈화문 아래로 들어섭니다. 창덕궁 돈화문은 조선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큰 문입니다. 왕의 행차나 궁궐의 큰 행사(의례)가 있을 때 사용했어요. 신하들은 궁궐 서쪽 금호문으로 출입했고요. 창덕궁의 첫 마중은 ‘학자의 나무’라 불리는 회화나무입니다. 돈화문 행각 주변에는 수령이 300~400년이나 된 회화나무 고목이 느티나무와 어울려 높게 자라고 있습니다. 겨울의 회화나무는 자유분방하지만 기상과 절개가 더욱 위용을 더합니다. 그 너머로 봄부터 가을 사이 무성한 잎에 가려졌던 현대건설이 보이네요.
[ 지난 2012년 현대건설은 보물 1762호인 창덕궁 금천교 복원공사를 마무리하고 통수식을 가졌습니다 ]
돈화문과 금호문 어느 쪽에서 들어서든 금천교를 건너 본격적인 궁궐로 진입합니다. 금천교는 현존하는 궁궐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 됐습니다. 궁궐에는 대부분 금천(禁川)이 있습니다. 물길을 건널 때 사사로운 감정을 금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로 조성된 하천입니다. 말랐던 금천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은 현대건설이 ‘문화재지킴이’ 활동의 일환으로 2011년부터 수로공사 등을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경복궁에 가본 적이 있으시다면 금천교를 건널 즈음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뭔가 다르지 않나요? 조선의 제1 궁궐인 경복궁은 궁궐 건축의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 등 전각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그 축을 따라 좌우 대칭으로 다른 건물을 배치했습니다. 그런데 창덕궁은 금천교 앞에서 방향을 오른쪽으로 틀게 됩니다. 이미 일직선이 아니지요. 정전 입구인 인정문 앞에서는 또 왼쪽으로 꺾고요. 심지어 인정전과 인정문의 축 좌우의 전각도 대칭을 이루지 않습니다. 현대 건축가들은 공간의 경험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동선을 다채롭게 변주합니다. 물론 창덕궁은 그런 의도로 조성한 건 아니겠지만 덕분에 궁궐산책이 한층 흥미진진하고 자유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이왕이면 창덕궁
창덕궁은 뒤편 매봉산 자연에 순응하며 건물을 얹히려 했습니다. 설령 왕의 집일지라도 자연과 다투지 않는 건축을 택한 거죠. 경사와 지형을 따라 인정전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또 앞으로 한 걸음 나오기도 하면서요. 이게 창덕궁 산책의 매력입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나 봐요. 창덕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데요. 자연과 조화로운 건축 배치가 주요한 등재 요인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창덕궁’이라는 속담까지 생겨난 거겠죠.
[ 궐내각사 내 책고에는 가을이면 곱게 물드는 은행나무가 자리해 단풍명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
그럼 제가 좋아하는 창덕궁 내 ‘숨은 명소’ 몇 곳을 소개해볼게요. 금천교를 건너기 전 왼쪽 편은 궐내각사입니다. 창덕궁 가이드북은 궐내각사를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소개합니다. 그 오밀조밀한 전각 사이를 거니는 건 꽤나 은밀한 즐거움입니다. 얼마간은 모험 같기도 해요. 궐내각사 지나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면 다다를 수 있는 막다른 자리에 책고(冊庫)가 있습니다.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봉모당의 뒤편입니다. 책고(冊庫)’는 ‘책 창고’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서고입니다. 마당에는 은행나무 고목이 있어 다정한 가을 단풍을 선사합니다. <궁궐 걷는 법>을 쓴 이시우 작가가 알려준 곳인데, 궁궐의 장엄함과는 거리가 있는 터입니다만 겨울에는 마른 공기 사이로 오후 볕을 쬐며 무념무상으로 머물기 좋습니다.
[ 창덕궁과 창경궁 경계 부근에 자리 잡은 낙선재. 고종의 고명 딸이었던 덕혜옹주의 거주지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
낙선재 일원은 살짝 떨어져 외딴 공간처럼 자리합니다. 독서광이었던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인 낙선재, 경빈 김 씨의 처소 석복헌, 대왕대비 순원왕후를 위한 수강재로 이뤄져 있죠. 1989년까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가 살았던 집이기도 해요. 금천교를 지날 때처럼 뭔가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지실 거예요. 색색의 단청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궁궐 안의 집이지만 소박하고 검소합니다. 그 중 석복헌은 ‘헌종의 로맨스’가 유명합니다. 그는 왕비 간택에서 보았던 경빈 김 씨를 잊지 못해 훗날 후궁으로 맞았습니다. 그녀를 위해 지은 집이 석복헌이고요.
[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 희정당 입구. 계단과 함께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사실 창덕궁을 제 개인 취향의 장소들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구한말 격변기의 역사들로 원래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당장 창덕궁 인정전만 해도 서양식 특징이 보입니다. 서양의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에 수리했지만 혼란스런 시대의 상황들도 적잖이 작용했을 겁니다. 샹들리에(전구)가 달려 있고 커튼이 있고 바닥은 전돌이 아닌 쪽나무 마루에요. 그러므로 조정을 향해 열린 공간보다는 안으로 닫힌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 희정당이나 대조전에도 샹들리에가 달려 있죠. 희정당은 입구도 특이해요. 눈비를 피할 수 있는 누각과 완만한 곡선의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어요. 휠체어 이동을 위한 무장애 길인가 싶지만 순종의 어차, 즉 왕의 자동차가 거기까지 들어온 흔적이라고 합니다.
불확실한 세상의 작고 확실한 행복, 창덕궁 후원의 설경
[ 창덕궁 후원 애련지의 눈 내린 풍경. 정조는 후원의 아름다운 곳을 골라 상림10경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
전각만으로는 ‘자연과 다투지 않는 궁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후원으로 걸음을 옮겨보세요.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서 경치가 빼어난 10곳을 골라 상림10경이라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눈 내린 다음 날의 후원은 창덕궁 설경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 창덕궁 후원 내 관람지 설경.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의 촬영지로 연못 주변의 정자들이 멋스럽습니다. (사진 제공: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
창덕궁 후원은 골짜기의 지형을 활용한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영역이 서로 다른 매력을 뽐냅니다. 연못과 정자가 있으니 인위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숲과 나무의 품에 몸을 낮추어 자리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히 드라마 <킹덤>에도 나오는 관람지는 연못 주변으로 네 개의 정자가 있습니다. 둥근 3개의 연못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꾼 까닭입니다. 각각의 정자는 그 생김이 개성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동쪽 관람정은 보기 드문 부채꼴 형태의 정자입니다. 람(纜)은 닻줄을 뜻하는 말로 관람(觀纜)은 뱃놀이를 구경한다는 의미에요. 현판 또한 초록색 나뭇잎 모양에 흰색 글씨라, 마치 연못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뭇잎 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일 위쪽에 있는 승재정에서 보면 관람정의 부채꼴 형태가 가장 잘 보이니 사진을 촬영하실 때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 현대건설의 사옥 동측 휴게실에서는 창덕궁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
후원은 관람지를 지나며 오르막입니다. 관상용 정원이 아니라 자연으로 걸어 들어가 즐기는 정원이라는 걸 말해줍니다. 숲은 한층 깊어져 결국에는 시나브로 궁궐이라는 사실마저 잊게 해요. 그때 나뭇가지나 정자 위에 다소곳이 때로는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은 겨울이 피워낸 꽃일 테고요. 보수공사로 옥류천 영역을 볼 수 없는 게 일말의 아쉬움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짧은 시간에 창덕궁의 모든 걸 보겠다 욕심 낼 필요는 없습니다. 창덕궁은 서울 도심에 위치해 있잖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해 손쉽게 찾을 수 있으니 가끔씩 그리고 조금씩 누려 맞이하세요. 특히나 현대건설 임직원 분들은 휴게실 창밖으로 창덕궁의 계절이 변하는 걸 느끼실 수도 있고요. 짧은 반나절의 짬이라면 전각관람을, 주말의 여유라면 기어이 후원의 내밀한 숲까지 다다라 가까이 있어 소홀했던 것들을 다시금 품에 안아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눈이 내린 다음 날이라면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좋겠고요.
새해입니다. 한참 지난 말이 되었지만 문득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니다. 작고 확실한 행복, 이렇게 쓰고 나니 ‘거창한’이 아닌 ‘작은’이라서, 무엇보다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소홀히 하지 않는 확실한 행복이라 해도 좋겠고요. 많은 것이 불확실한 세상입니다. 확실한 행복 하나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행복을 소홀히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무척 고마운 일이자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현대건설 임직원 여러분과 이 칼럼을 읽고 계신 독자분 모두 2024년 새해, 행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글. 박상준 대학에서는 조경학을 전공하고, 여행주간지 〈프라이데이〉와 영화주간지 〈씨네버스〉 취재기자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 중이며 한국관광공사 등에 일상과 밀착한 여행 정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서울 계동과 부암동을 좋아합니다. 저서로는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 <오!!! 멋진 서울> <엄마, 우리 여행가자> <다른 제주에 가다> <울릉도100배 즐기기> 등이 있습니다. |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현대건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 일러스트=이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