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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박상준의 북촌기행 시리즈 #4] 미술의 거리 사간동&삼청동

2023.09.22 5min 35sec

지하철 3호선 현대건설역. 서울교통공사가 진행한 '지하철 역명 유상병기 사업자 공모'로 인해 지난 9월부터 안국역에 붙여진 새로운 부역명입니다. 현대건설인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일상공간인 안국역. 이곳의 숨은 이야기와 매력을 전문가의 시각으로 만나봅니다.


진짜 예술은 오늘의 산책입니다


집옥재 작은도서관, 국제갤러리 동면한옥전 아니쉬카푸어전,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전 김구림전, 갤러리현대 사라모리스전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경복궁, 열린송현, 안국(현대건설) 3호선


소슬바람 불면, 예술이야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 IDEA에서 ‘토끼 놀이터(The Rabbit Playground)’가 본상(Finalist)을 수상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토끼 놀이터는 현대건설이 힐스테이트 홍은 포레스트에 설치한 놀이 시설물이라죠. 팝아트 작가와 컬래버레이션 한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작가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것이 아닌 3D 프린팅 기술로 구현한 어린이 놀이시설이라니 더욱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예술과 문학은 인간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고 싶습니다. 가을이라 더 그런가 봅니다.


소슬바람 불면 우리의 감성은 너그러워집니다. 사근사근하죠.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찾는 것도 본능적일 겁니다. 저는 요즘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에서 2개의 전시가 동시에 열리기도 한 라울 뒤피는 ‘니스의 열린 창문(window opening on nice)’이란 작품을 보고 홀딱 반해 버렸습니다. 율동과 리듬이 있는 그림이라 그럴까요? 자꾸만 여행을 부릅니다. 


삼청동

[ 갤러리가 밀집해 있는 사간동과 삼청동은 가을이면 단풍과 함께 예술의 정취를 느끼려는 이들로 가득합니다 ]


들뜬 마음을 달래려 사간동과 삼청동으로 향합니다. 열린송현녹지광장, 갤러리현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제갤러리까지 흥미로운 전시와 이벤트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전시지만, 주제별로 작가를 짝지어 감상하면 한층 진진합니다. 여기에 경복궁 야간개방과 집옥재 작은 도서관 재개방까지, 저의 가을 버킷리스트는 그 길 위에 가득합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옆 사간동 갤러리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진행 중인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는 작은 연못과 야트막한 능선의 ‘땅 소’와 높이 12m의 계단으로 만들어진 전망대 ‘하늘 소’ 등 실험적 구조물이 관람객의 이목을 끕니다 (사진: ⓒ서울시청 제공) ]


지하철 3호선 안국 현대건설역 1번 출구로 나와 서둘러 열린송현녹지광장으로 갑니다. 광장은 이미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10.29)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작은 연못과 야트막한 능선의 <땅 소(所)>, 지름 18m의 거대한 광주리를 엎어 놓은 모양의 <파빌리온 ‘짓다’> 등 실험적 구조물이 많습니다. 관객 참여형 작품 <사운드 오브 아키텍처>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23개의 유닛이 각기 다른 이미지와 소리를 연출해 꽤나 흥미롭습니다. 그럼에도 제일 눈길을 끄는 건 비엔날레 총감독 조병수 건축가의 <하늘 소(所)>입니다. 높이 12m의 계단 형태 전망대인데요. 경북궁과 인왕산, 멀리 북한산까지, 서울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그 위에 서니 풍수지리를 살피는 지관이 된 것 같습니다. 


광장을 돌아보고는 서쪽 사간동으로 이동합니다. 사간동은 낯선 지명일 겁니다. 동십자각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사이에 있는 동네인데, 다들 삼청동 초입 정도로 여기죠. 하지만 그리 쉽게 뭉뚱그릴 수만은 없습니다. 적어도 미술 측면에서 사간동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생기기 전부터 ‘갤러리 촌’, ‘미술의 거리’라 불려 왔고, 갤러리현대, 금호미술관, 학고재, 국제갤러리 등 미술관의 면면이 쟁쟁합니다.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인 사라 모리스의<Pinecones and Corporations> 전시 전경

[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인 사라 모리스의 <Pinecones and Corporations> 전시 전경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andGallery Hyundai. Photo by Tom Powel Imaging) ] 


처음 뿌리 내린 건 갤러리현대입니다. 1970년 인사동 현대화랑으로 출발해 1975년 사간동으로 옮겨왔지요. 시간이 지나 신관(삼청로14)과 별관 두가헌갤러리도 더해졌습니다. 전시가 활발한 곳은 신관입니다. 오는 10월 8일까지 성능경과 사라 모리스의 전시가 열리고 있습니다. 사라 모리스의 전시 타이틀인 ‘Pinecones and Corporations’(~10.08)의 다른 의미는 자연과 사회일 겁니다. 파리, 아부다비, 오사카 등을 담은 영상 작품도 상영됩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그리는 서울의 미래와 연결고리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개념 있는 실험 미술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인 성능경의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 전경

[ 갤러리현대에서 진행 중인 성능경의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전시 전경 (사진: ⓒ갤러리현대 제공, Courtesy of the artist & Gallery Hyundai) ]


갤러리현대의 또 다른 전시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10.08)은 제목부터 남다릅니다. ‘망친 예술’과 ‘행각’을 주장하는 예술가라니요. 작가의 ‘한국적 개념미술의 선구자’라는 수식이 아깝지 않습니다. 현재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공동으로 기획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이 진행 중입니다. 성능경과 김구림, 이강소 작가 등이 함께하죠. 그러니 성능경 작가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진행 중인 ‘김구림’전과 연결해 보시면 우리나라 실험미술의 계보가 보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김구림> 전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김구림> 전은 우리 실험미술의 진수이자 역사를 보여줍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김구림’(~2024.02.12.) 전은 우리 실험미술의 진수이자 역사입니다. 작가의 작품 230여점은 도전과 저항의 메시지고요. 아니나 다를까, 개관전을 앞두고 재미난(?) 에피소드도 생겼습니다. 작가는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미술관에 요구한 퍼포먼스가 무산됐다”라며, “전시에 고리타분한 것들만 늘어놔 너무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미술관 측은 머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구림 작가는 87세, 성능경 작가는 79세에요. 예술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걸 깨닫게 합니다. 당장 두 작가의 퍼포먼스 이미지만 검색해도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MMCA 현대차 시리즈

[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MMCA 현대차 시리즈’의 올해 주인공은 정연두 작가입니다. '정연두-백년 여행기'는 서울박스를 활용한 대형 전시가 이목을 끕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김구림, 성능경 작가가 우리나라 실험미술을 이끌었다면 정연두, 양혜규 작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다음 세대입니다. 두 작가는 ‘MMCA 현대차 시리즈’ 전시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프로젝트입니다. 매년 우리나라 대표 중진 작가 1팀을 선정해 신작을 선보일 기회를 제공하는데, 대형 전시라서 서울관이 자랑하는 서울박스를 적극 활용합니다. 서울박스는 높이 12m, 너비 15m의 커다란 입체 공간이에요. 평소에는 지하층 로비 역할을 하지만, 이곳이 전시관으로 바뀌면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즐거운 기다림입니다. 올해는 정연두 작가가 그 주인공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백년 여행기’(~2024.02.25.)가 한창입니다. 


가까운 국제갤러리 한옥 공간 송현재에서는 ‘MMCA 현대차 시리즈 2020’ 전시 작가였던 양혜규의 프레젠테이션 ‘동면 한옥’(~10.08)도 열리고 있습니다. 국제갤러리의 해외 작가 ‘아니쉬 카푸어’(~10.22)의 전시도 놓칠 수 없어요. 시카고를 대표하는 공공미술, 밀레니엄 파크의 <구름문(Cloud Gate)>으로 유명한 작가입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이 가장 싫어하는 예술가이기도 해요. 빛의 99.9%를 흡수하는 세상 가장 검은 물감, ‘반타블랙’의 독점권을 사들였거든요. 이번 국제갤러리 전시에는 반타블랙을 사용한 작품을 비롯해 조각, 페인팅, 드로잉을 망라합니다. 일부 작품은 사람의 내장을 연상시킬 만큼 강렬하니 참고하세요.



사간동 미술관 건축 순례 


국제갤러리 1관은 지붕 위의 ‘하늘을 향해 걷는 여자’

[ 배병길 건축가가 리모델링한 국제갤러리 1관은 지붕 위의 ‘하늘을 향해 걷는 여자’가 상징이 된 건물입니다 ]


전시만이 아닙니다. 사간동과 삼청동은 미술관을 위해 꼭 한 번 다녀와야 합니다. 각 건물을 맥락지어 감상하면 한층 간간합니다. 같은 건축가의 다른 개성이랄까요. 국제갤러리 1관에서 시작할게요. 지붕 위의 ‘하늘을 향해 걷는 여자’가 상징이 된 건물이죠. 1991년 배병길 건축가가 리모델링했습니다. 당시에는 직선이 아닌 사선 형태, 이색 재료의 조화가 파격이었습니다. 10년 전에는 골목 안쪽에 국제갤러리 3관이 개관했어요. 네덜란드 건축가 프로리안 아이덴버그(설계사무소 SO-IL)가 메시라는 신소재를 사용해 마치 그물망이 건물을 덮은 것 같습니다. 1관이 1991년의 실험 건축이었다면, 3관은 2013년의 건축의 실험이라 할만 합니다. 


참, 배병길 건축가는 2005년 갤러리현대 신관 개증축 공사도 맡았습니다.  14년 전 지은 국제갤러리는 미술관도 작품으로 존재한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외관부터 시선을 끌거든요. 반면 갤러리현대 신관은 형태를 드러내지 않고, 작품을 담는 그릇으로 존재합니다. 두 건물을 보면 젊은 날의 생동과 중년의 연륜, 한 건축가의 다른 시간을 느껴볼 수 있어 좋습니다.


두가헌

[ 최욱 건축가가 리모델링한 두가헌 레스토랑 모습. 레스토랑 두가헌은 고종이 순헌황귀비 엄 씨에게 선물한 한옥입니다 (사진: 두가헌 레스토랑 홈페이지) ]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을 디자인한 최욱 건축가의 한옥 두 채도 비교해 볼까요? 갤러리현대 신관 안쪽에는 러시아풍 근대 건축 ‘두가헌갤러리’와 한옥 레스토랑 ‘두가헌’이 그 주인공입니다. 두가헌은 ‘매우 아름다운 집’이란 뜻으로 유홍준 작가가 이름 붙였습니다. 레스토랑 두가헌은 고종이 순헌황귀비 엄 씨에게 선물한 한옥입니다. 이를 최욱 건축가가 레스토랑으로 리모델링했습니다. 국제갤러리 옆에는 한옥 갤러리 학고재가 있습니다. 한옥 지붕에 적벽돌이 어우러진 건물입니다. 내부도 마찬가지라 흰색 벽과 한옥 서까래가 대비를 이룹니다. 이 또한 최욱 건축가의 작품입니다. 



옥처럼 귀한 보물의 시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경

[ 층수 제한과 문화재 보존 등 난제를 품고 절묘한 배치와 구성으로 완성한 민현준 건축가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


사간동과 삼청동 미술관을 이야기하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또한 빠질 수 없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이 든 성배’라고 불리었습니다. 바로 앞에 경복궁이 있어 층높이 제한이 있었거든요. 서울을 대표하는 미술관이 건립 전부터 규모를 뽐낼 수 없게 된 셈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에요. 미술관 부지 안에는 두 문화재, 한옥 종친부와 벽돌 건물인 옛 국군기무사령부 본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난관을 절묘한 배치와 구성으로 완성해낸 이가 바로 민현준 건축가입니다. 


몇 가지 특징만 말씀드리면 미술관에는 담장이 없습니다. 전시실은 지하로 스며들고 지상은 동네를 잇는 길이자 공원으로 자리매김하죠. 경계 없는 미술관이고 사람들의 쉼터가 된 겁니다. 그래서 파사드 역할을 하는 정문이이 명확하지 않아요. 대신 경복궁과 접하는 미술관 앞 쪽 비술나무 세 그루를 살려 지었습니다. 이 나무들은 서울관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입니다. 약 150살 먹은 고목들은 서울시 보호수에요. 조선시대부터 그 자리에 살았지요. 우리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지켜봤을 겁니다. 건축가는 공모안을 낼 때부터 이 나무의 보전을 전제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고 나서는 나무가 다칠까 노심초사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서울관의 랜드마크입니다. 마을을 지키고 선 장승이나 성황목처럼, 거리를 오가는 모든 이를 지켜주고 있어요. 저는 이 나무의 존재가 기적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나 온 역사에 대한 기적이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적의 증표 같아요. 


집옥재

[ 집옥재는 경복궁 가장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의 왼쪽에 위치한 고종의 개인 도서관이자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입니다. 궁궐 속 북카페에는 책 외에도 고종이 사랑했다는 ‘가배(커피의 옛말)’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사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


가을은 그런 계절입니다. 예술도 좋지만 비술나무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갈 수 있어야 하지요. 우리가 미술관에 가고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건, 우리의 가슴 속에 그런 소슬바람이 분다는 걸, 가을 단풍처럼 설레는 시간이 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함일 겁니다. 그러니 산책이 끝나기 전에, 비술나무 건너 경복궁 안 집옥재(集玉齋)의 시간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집옥재는 고종이 책을 읽고 사신을 맞이하던 서재입니다. ‘옥처럼 귀한 보물을 모은다’라는 의미예요. 현재는 작은 도서관으로 10월 30일까지 개방합니다. 궁궐 안의 도서관, 왕의 서재라니요. 그 고풍스런 장소에서 책장을 넘기면, 옥처럼 귀한 보물은 예술 작품만이 아니라 일상 속 짧은 산책 속에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시나브로 가을은 깊어갑니다. 그러니 우리, 오늘의 산책을 위해 신발 끈을 다시 매어보아요.




글. 박상준

대학에서는 조경학을 전공하고, 여행주간지 〈프라이데이〉와 영화주간지 〈씨네버스〉 취재기자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여행작가로 활동 중이며 한국관광공사 등에 일상과 밀착한 여행 정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서울 계동과 부암동을 좋아합니다. 저서로는 <서울 이런 곳 와보셨나요?> <오!!! 멋진 서울> <엄마, 우리 여행가자> <다른 제주에 가다> <울릉도100배 즐기기> 등이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현대건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이슬기, 게티이미지코리아, 서울시청, 갤러리현대, 두가헌 레스토랑,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국립현대미술관 / 지도 일러스트=원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