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을 만드는 기술’로 불려온 건설은 사회의 존속과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핵심 역량과 기술은 어떠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현대건설에서는 각 분야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이를 진단해보는 칼럼을 기획 연재합니다.
다시 주목받는 한국형 원전
지난 1월 16일 바라카 원전 3호기 가동 기념행사에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참석했습니다. 바라카 원전은 지난 2009년 현대건설을 비롯한 우리 기업이 대한민국 최초로 수주한 해외 원전이자 중동 최초의 원전입니다. 현재 1·2호기가 상업 운전 중이며, 3호기는 가동 준비를 마쳤고 4호기는 내년 완공 예정입니다. 원전 4호기가 모두 가동되면 UAE 전력 수요의 최대 25%를 공급할 수 있기에 현지 관심도 아주 높습니다.
[ 현대건설이 시공에 참여한 중동 최초의 원전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자력발전소 전경 ]
윤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양국이 추가 원전 협력을 창출하고 제3국 공동진출 등 확대된 성과를 창출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바라카 원전은 대한민국 기술력으로 설계한 발전용량 1400메가와트(MW)급 경수로 APR1400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APR1400은 지난해 말 가동을 시작한 현대건설의 또 다른 역작이자, 국내 27번째 원전인 신한울 1호기에도 들어간 최신 원자로입니다.
SMR 시장 선점을 위한 국내의 빠른 움직임
우리나라 원전 산업이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습니다. 중동 시장에서 이미 성능을 입증한 APR1400으로 대형 원전시장 진출에 탄력을 받은 것과 동시에 대형 원전을 건설하기 힘든 곳에서는 최근 각국이 기술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소형모듈원자로(Small Modular Reactor, SMR)로 공략을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현대건설이 미국 홀텍 인터내셔널과 함께 표준모델 상세설계 및 사업화에 착수한 소형모듈원전 ‘SMR-160’의 격납용기 차폐건물 내부(왼쪽)와 핵증기 공급계통(오른쪽) 이미지]
SMR은 전기출력이 300MW 이하인 소형 원자로로 가압기와 증기발생기, 노심을 모두 하나의 용기 안에 넣은 것이 특징입니다. 일체형이기 때문에 공장에서 사전 제작이 가능합니다. 원자로 크기가 작아 수조에 넣거나 자연대류 방식으로 냉각시킬 수 있어 안전성도 뛰어납니다. 덕분에 대형 원전은 냉각수 공급이 가능한 바닷가 등 수원(水原) 인접 부지에만 세울 수 있지만 SMR은 어느 기후, 어느 지형에서도 좁은 공간에 세울 수 있습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향후 8년 동안 한국형 독자 SMR 개발에 총 40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는 2012년 100MW 출력의 SMR인 스마트(SMART)의 표준설계 인가를 세계 최초로 받은 바 있죠. 실제로 우리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 스마트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원전 운영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은 179MW급 혁신형 SMR(i-SMR)의 기본 설계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2028년 허가를 받고 2030년대 수출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입니다. i-SMR 4기를 모으면 600MW급 기존 화력발전소를 대체할 수 있습니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대형원전은 콘크리트 타설부터 핵연료 장전까지 56개월 걸리지만, i-SMR은 공장에서 사전 제작해 단 24개월에 끝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규제 당국도 이런 SMR 개발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대한민국의 SMR 수출을 위해 선제적으로 인허가 규제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대형 원전과 설계와 기술이 다른 만큼, 초기 설계 단계부터 개발자와 소통해 효율적이고 신속한 인허가 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군사 강대국과 기술경쟁 불가피
[SMR은 원래 과거 미국과 옛 소련이 핵잠수함과 핵항공모함에 쓰던 기술을 민간 발전용으로 전용한 것입니다]
SMR은 원래 과거 미국과 옛 소련이 핵잠수함과 핵항공모함에 쓰던 기술을 민간 발전용으로 전용한 것입니다. 때문에 군사 강대국일수록 SMR 기술력이 뛰어납니다.
러시아는 2019년부터 선박에 35MW급 SMR 2기를 적용한 세계 최초의 부유(浮游)식 원전인 ‘아카데믹 로모노소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장비가 일체화돼 기존 전력망에 쉽게 연결할 수 있죠. 러시아는 화력발전소에 의존하던 오지에 해상 SMR로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실행 중입니다.
[현대건설과 홀텍 인터내셔널이 함께 개발 중인 소형모듈원전 표준모델인 SMR-160 조감도. SMR-160은 미국 오이스터 크릭 원전 해체부지에 최초로 배치될 예정입니다]
육지에서는 미국이 앞서 있습니다. 현대건설이 협업 중인 홀텍 인터내셔널은 160MW급 SMR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사막, 극지 등 지역 및 환경적 제한 없이 배치가 가능한 범용 원자로인 ‘SMR-160’은 안전성을 검증받아 미국 에너지부의 ‘차세대 원자로 실증 프로그램’ 모델로 선정됐습니다. 현재는 캐나다 원자력위원회(CNSC)의 원자로 설계 예비 인허가 1단계를 통과했고 미국 원자력위원회(USNRC)의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대표 원전 기업인 현대건설이 상용화를 위한 표준모델 상세설계에 직접 참여해 그 기대가 남다른데요. 현대건설과 홀텍은 설계가 완료된 SMR-160의 표준모델을 ‘오이스터 크릭’ 원전해체 부지에 최초로 배치할 계획이며, 향후 유럽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 공동 진출을 모색하는 등 긴밀한 협조를 이어갈 계획입니다.
이 외에도 미국의 뉴스케일 파워는 2020년 말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설계인증을 받아 2030년까지 아이다호주에 SMR 6기를 묶어 462MW급 원전 단지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며,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테라파워를 설립하고 GE-히타치와 345MW급 차세대 SMR인 ‘Natrium’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Natrium’은 이름 그대로 냉각재로 물 대신 액체 나트륨을 사용해 원자로 열을 식히면서 동시에 열을 저장하는 역할도 하게 되는데요. 이 SMR은 속도가 높은 고속 중성자를 핵연료에 충돌시켜 기존 원전에 쓰지 못하던 우라늄238*을 핵분열이 가능한 플루토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고속 중성자를 이용한 이런 방식의 원자로는 가동 중에 핵분열이 가능한 연료가 늘어난다고 해서 고속 증식로라고 부릅니다.
*우라늄 중 자연계에 가장 풍부하게 존재하는 동위 원소로 천연 우라늄의 99%가 우라늄 238이다.
중국도 SMR 시장에 진출 본격화
[중국핵공업집단공사(CNCC, 중핵그룹)는 하이난(海南)성 창장(昌江)에 상용화 모델 소형원자로(SMR)인 '링룽(玲龍) 원'를 정식 착공하는 등 원자력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SMR은 현재 한국을 포함해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에서 70여 종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절반은 기존 대형 원전과 같은 경수로 방식인 3세대이고, 나머지는 나트륨을 활용한 SMR 같은 4세대입니다. 원래는 출력이 300MW 이하인 원자로만 SMR로 불렸으나, 최근에는 안전기술이 발전하면서 그보다 용량이 큰 원자로라도 일체형이면 SMR로 분류합니다.
최근 원자력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중국도 이 SMR에 뛰어들었습니다. 중국은 남부 하이난성 창장에 SMR ‘링룽 원’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건설 중인 SMR은 링룽 원이 유일합니다. 러시아가 해상 SMR을 운영하고 있으나, 육지에 건설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링룽 원이 2026년 본격 가동하면 육상 풍력발전기 40기에 해당하는 125MW 출력을 낼 전망입니다. 중국은 이 SMR로 해수담수화에 필요한 열과 전기를 공급한다는 계획입니다.
국내 건설, 조선업체들도 SMR에 투자
[현대건설은 지난해 10월 윤영준 사장(오른쪽)과 홀텍 크리쉬나 P. 싱(Dr. Kris Singh) 대표(CEO & President)가 SMR-160 첫 상용화 모델 개발과 사업화에 대한 착수식을 진행하는 등 SMR분야에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SMR 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세계경제포럼(WEF)는 2040년까지 SMR 시장의 성장률이 연평균 22%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영국 국가원자력연구원(NNL)도 2035년 세계 SMR 시장 규모가 2500억~4000억 파운드(한화 약 380조~609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죠.
때문에 이에 대비한 국내 업체들의 경쟁도 치열해진 상황입니다. 국내 건설사들은 해외 업체와 손잡고 SMR 시장 공략을 본격화 하고 있습니다. 영국 원전시장에 진출하기로 한 미국 홀텍 인터내셔널은 이미 현대건설을 시공 파트너로 영입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홀텍 인터내셔널은 2050년까지 영국에 160MW급 SMR 32기를 짓는다는 계획이어서, 현대건설의 수주량도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윤영준 현대건설 사장은 지난해 10월 홀텍과 가진 사업착수식에서 “에너지 시장 게임 체인저로서 세계 최고 기술력·사업 역량을 결합해 입지를 다지겠다"며 "해체를 포함한 차세대 원전 사업 분야에서 긴밀한 협력 관계를 통해 원자력 생태계 발전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현대건설은 홀텍 외에도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협약을 맺고 경수로형 SMR 시공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차세대 비경수로형 SMR 기술 개발도 같이하기로 하는 등 국내 독자 기술력 확보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SMR 분야는 최근 건설사뿐 아닌 조선사의 투자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SMR에 쏟아지는 관심은 건설사만이 아닙니다. 조선사들 역시 SMR 투자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한국조선해양,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이 해상 원전에 적합한 SMR 사업에 뛰어들고 있으며, HD현대의 조선중간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은 테라파워와 3000만 달러(약 368억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했습니다.
SMR은 안전성이 뛰어나고 건설 비용, 시간이 줄어든다는 장점 외에 노후 발전소를 쉽게 대체할 수 있다는 점도 가파른 성장세의 비결로 꼽힙니다. 코트라(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는 지난해 말 보고서에서 “SMR은 전기교환기, 석탄 발전소 터빈 등 기존 기반 설비를 활용해 가동할 수 있다”며 “기존 인프라와 설비를 활용해 SMR을 운행하면 기본 투자 비용이 절감되고, 게다가 가장 큰 인프라인 송배전을 추가로 설치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분석했습니다.
미국전기전자공학회(IEEE)가 발간하는 스펙트럼지는 지난 1월 16일 ‘원자로의 미래는 소형(The Future of Fission Reactors May Be Small)’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이 기사에서 이탈리아 밀라노 공대의 조르지오 로카텔리 교수는 “향후 15~20년 안에 SMR이 상용화되고 널리 보급되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SMR이 원전 산업의 유일한 미래는 아니더라도 유력한 미래인 것은 확실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글. 이영완 조선비즈 과학전문기자. 서울대 미생물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을 수료했습니다. 동아일보와 동아사이언스를 거쳐 조선일보에서 19년간 과학기자로 일하다 지난해 9월부터 조선미디어그룹 조선비즈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019년부터 4년간 한국과학기자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과학기술부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한국과학기자협회 올해의 GSK 의과학 기자상,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창의보도상, 한국공학한림원 해동상을 받았습니다. |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현대건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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